거란 공격에 한 달 못 버티고 전격적으로 무너진 발해…다양한 종족 구성에 잦은 임금 교체로 정치 혼란 거듭

입력 2021-07-05 09:00   수정 2021-07-06 00:06


한 나라의 멸망은 하루아침에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오랜 기간 많은 신호를 보내지만 깨닫지 못한 채 당할 뿐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전쟁 등이 그랬다. ‘발해국’의 멸망을 화산 폭발 탓으로 돌리려는 사고는 수백 년 쌓인 관습적 오류일 따름이다.
전격적인 거란의 공격
요나라의 황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발해국은 대대로 원수인데, 아직 보복을 완수하지 못했다”며 925년 윤 12월, 푸른 소(靑牛)와 흰 말(白馬)을 죽여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냈다. 예상을 깬 겨울작전을 펼쳐 부여성(지린성 농안)을 3일 만에 함락했다. 발해의 노상(老相)이 3만 명의 군대로 저항했으나 패했고, 요군은 수도인 홀한성(상경성, 헤이룽장성 닝안현)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임금은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은 채 신하들과 함께 엎드려 빌었다. 228년의 역사는 허무하게 끝났다. 임금인 대인선과 왕비는 요나라에서 ‘오로고(烏魯古)’ ‘아리지(阿里只)’로 불렸는데, 끌려갈 때 탔던 말의 이름이다.

발해는 신비한 나라다. 건국도 극적이었지만 붕괴도 전격적이었고, 멸망 원인과 시기도 불명확하다. 또 ‘발해’와 ‘발해인’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역사에 등장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으며, 승병(勝兵)이 수만 명이고, 사방 5000리에 달한 영토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 발해는 왜 채 한 달도 못 버티고 멸망했을까? 역사가 후손에게 줄 유산은 ‘자랑’이 아니라 ‘교훈’이며, 남 탓이 아니라 제 탓을 하는 자세다.
한 달도 못 버틴 228년의 역사
21세기와 마찬가지로 국제관계는 국가 흥망성쇠의 중요한 요소다. 10세기 들어와 동북아시아는 국가 간 질서재편으로 소용돌이쳤다. 당나라가 907년에 붕괴되면서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대분열 시대가 시작됐고, 910년대에는 9개국이 난립한 상태였다. 토번(티베트)은 서남 지역의 영토를 대거 잠식했고, 몽골 초원에서는 세계사를 바꿀 ‘몽올’ 부족이 성장했으며, 840년에 멸망한 위구르 한(칸)국의 망명인들 또한 혼란을 일으켰다. 일본은 발해와 시종일관 우호관계를 유지했지만, 섬나라라는 위치와 능력 부족으로 인해 주변부적 존재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한편 남쪽에서는 신라가 1000년의 역사를 마감하는 중이었고, 신흥세력인 후백제와 고려가 긴박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대분열 시대는 모든 국가와 인물들에게 양날의 칼로 작용한다. 위기이며 성공의 기회이기도 하다. 국제질서의 변화를 간파한 야율아보기는 동몽골의 초원지대와 요서에서 거란족을 통일(916년)하고, 서남쪽으로 토욕혼 등을 공격한 후에 몽골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이효형, 《발해유민사 연구》) 하지만 중국 세력, 북쪽의 실위·돌궐 등 세력과는 갈등구조였고, 발해의 동족국가인 고려 존재도 불안했다. 그런데 요동지역은 팽창에 적합하고, 철·곡식·소금 등이 풍부한 경제지대였다. 그는 918년에 요양을 점령했고, 이어 요양성에 발해 포로를 배치했다. 발해는 즉시 반격을 가해서 백성을 구출했고, 918년에는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요동 쟁탈전은 계속돼 924년에도 요의 공격을 두 차례나 받았으며, 결국 전면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넓은 영토와 다양한 종족, 관리 어려워
발해는 내부에 근본적인 취약점이 있었다. 넓은 영토에 자연환경이 거칠고 종족들도 다양하므로 관리체제가 느슨했다. 유사시에는 분열현상이 표출됐는데, 흑수말갈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또 임금의 잦은 교체로 정치에 혼란이 생겼고, 잦은 천도(5회·수도 이전)로 재정이 악화됐으며 지역감정은 커졌다. 멸망 전인 925년에 장군인 신덕과 부하 500명을 비롯한 예부경 등 고위관료들이 100호의 백성과 함께 고려로 투항했다. 심각한 권력 쟁탈전이 일어났고, 백성은 마음이 떠난 채로(因彼離心,《요사》) 나라의 위기를 방관했음을 알려준다. ‘백두산 화산 폭발설’도 멸망 원인으로 제기된다. 1995년에 일본 학자 마쓰다 히로시가 주장해 관심을 끌었는데, 백두산은 발해가 멸망한 후인 937년 무렵에 폭발했다. 하지만 잦은 예비 화산활동이 민심을 혼란스럽게 했을 가능성은 있다.
√ 기억해주세요
요나라의 황제 야율아보기는 925년 윤 12월, 예상을 깬 겨울작전을 펼쳐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상경성)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발해는 건국도 극적이었지만 붕괴도 전격적이었다. 넓은 영토에 자연환경이 거칠고 종족들도 다양하므로 관리 체제가 느슨했다. 임금의 잦은 교체로 정치에 혼란이 생겼고, 잦은 천도(수도 이전)로 재정이 악화됐으며, 백성은 마음이 떠난 채로 나라의 위기를 방관했다. 228년의 역사는 허무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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